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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경] 투기공화국과 작별하기 위해 : 경로의존성이 지닌 힘을 벗어나려면

작성자 : 관리자 (211.227.108.***)

조회 : 1,850 / 등록일 : 20-02-05 15:32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e)이라는 말이 있다. 과거의 하나의 선택이 관성(inertia) 때문에 쉽게 변화되지 않는 현상을 일컫는 용어인데, 사회과학계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경로의존성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게 영문 타자기의 키 배열이다. 오늘날에도 타자기와 PC를 막론하고 표준적인 키 배열은 좌측 상단에 QWERTY로 배열되어 있다. 이 배열은 기계식 타자기가 대세일때의 산물일 뿐 가장 효율적인 키 배열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여전히 보편적인 키 배열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랜 기간 동안 소비자들의 사용습관이 하나의 경로로 고착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는 제도, 법률, 문화, 습관, 과학, 기술 등에 걸쳐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한번 만들어진 경로는 외부의 충격이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간해서는 변하지 않고, 그 속성이나 지향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강하게 나타내며, 점점 고착되는 양상을 보인다. 대한민국에서 경로의존성의 대표격인 부문이 '부동산'이다. 건국 이후 제3세계 국가들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농지개혁을 통해 근대화의 기반-개혁의 최대방해물인 지주계급의 소멸 및 평등한 사회경제적 출발선 마련-을 구축한 대한민국은, 박정희 집권기를 거치면서 '지대(地代)의 사유화'를 사회경제적 발전의 경로로 채택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박정희 시대는 투기공화국, 불로소득 추구 공화국의 진정한 출발이었다. 이정우(2011)에 따르면 박정희의 집권기인 1963~79년의 16년 동안 전국의 지가 총액이 3.4조 원에서 329조 원으로 폭등함으로써 무려 100배에 달하는 상승률을 기록했는데, 박정희 집권 마지막 해를 기준으로 할 때 지가총액은 국내총생산의 무려 12배에 달하고, 박정희 통치 전 기간을 합하면 토지 불로소득은 생산소득의 두 배 반을 가볍게 넘는다. 박정희 치하의 대한민국 지가는 상승률과 지가상승 기여도 측면에서 타 정권의 추종을 불허한다. 반면 박정희 집권 기간 중 실질임금은 4배, 은행이자는 17배 가량 상승했다. 박정희 체제의 유산 중 하나인 투기공화국, 지대 추구 공화국은 하나의 경로로 고착돼 지금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철옹성이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지대추구 및 이를 노린 부동산 투기는 분배를 악화시키며, 토지의 최적 사용을 방해하고, 생산과 소비를 위축시키며, 경기변동의 진폭을 크게 만들고, 개발 갈등을 유발하며, 주택문제를 악화시키는 등의 악영향을 미친다. 또한 지대추구 및 이를 노린 부동산 투기는 토건분야에 엄청난 예산 할당을 강요하며, 토건형 산업구조를 고착화시키고, 부정부패를 양산하며, 경제위기와 노사갈등의 원인 중 하나가 되곤한다. 대한민국에서 투기공화국적 성격을 탈각시키지 못하는 한 대한민국의 건강한 발전은 연목구어에 불과한 셈이다.

 

문제는 한국사회의 정상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투기공화국적 성격이 강한 경로의존성을 가지면서 지금에 와서는 궤도를 수정하기가 무척 어럽게 됐다는 사실이다. 국민경제에서 토건 관련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의 크기와 영향력은 차치하더라도 근래 선거 결과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부동산, 정확히 말해 부동산 가격 상승 및 유지, 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과 기대는 과잉상태다. 

 

분명한 건 부동산에 생사를 건 시민들에게 부동산 문제의 해악과 폐해에 대한 계몽과 선전을 아무리 한들 마이동풍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시민들로 하여금 부동산 가격 상승에 대한 기대와 염원을 단념하고 좋은 부동산 철학과 정책을 지지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 즉 투기공화국의 인질이 된 시민들을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시민들이 투기공화국과 작별하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제공하는 것 뿐이다. 그 대가가 보편적 복지가 됐건 기본소득이 됐건 말이다. 시민들로 하여금 가망도 없는 부동산 투기에 골몰하지 않아도 인간적 존엄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자는 것이다. 이런 수준의 메가딜(Mega Deal)없이는 그 무엇보다 완강하게 자리 잡은 투기공화국이라는 경로를 교정할 방법이 없다. 

 

첫 단추를 잘못 꿰면 마지막 단추를 꿸 곳이 없어지듯이 중요한 경로를 처음에 그릇되게 설정하면 경로의존성으로 인해 왜곡된 경로를 바로잡는 것이 너무나 힘들게 된다. 부동산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대한민국이 지금 그런 처지다.더 늦기 전에 왜곡된 경로를 바로잡아야 한다. 투기공화국과 작별해야 한다.

 

<출처 : 2014년 2월 14일자 미디어오늘>

 

이 태 경 / 토지+자유연구소 연구위원
토지정의시민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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