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값정책 실패’ 아이콘이 된 김수현을 위한 변명
이태경 / 토지+자유연구소 부소장
김수현 전 청와대 실장이 책을 냈다. ‘부동산과 정치'(오월의 봄)라는 제목의 책이다. 김 전 실장은 문재인 정부 부동산 정책 실패의 아이콘처럼 여겨지는 사람으로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지탄을 받고 있는 터에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왜 좌절했는지, 부동산 문제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지를 담은 책을 낸 건 의미심장하다. 김수현 전 실장에 대한 사감이나 선입견을 배제하고 ‘부동산과 정치’를 정독하면 얻을 것이 참으로 많다. 진보개혁진영이 윤석열 이후를 대비한 부동산 정책 패키지를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단서들이 빼곡하다.
징비록을 연상케 하는 김수현 전 실장의 ‘부동산과 정치’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은 누구일까? 여러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지만 문재인 정부 당시 사회수석과 정책실장을 역임한 김수현 전 실장을 빼놓을 수 없을 듯 싶다. 김 전 실장은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비서관을 맡아 종부세 등의 부동산 정책설계에 깊숙히 관여했고, 문재인 정부 시절 전반기(2017.5~2019.6)에는 사회수석과 정책실장을 맡아 부동산 정책 전반을 지휘했다.
노무현 정부는 부동산에 관한 한 건국 이래 가장 개혁적인 정부였고, 문재인 정부도 나름대로 집값 안정을 위해 분투한 정부였다. 하지만 집값만 놓고 보면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는 가격 급등의 쓰나미를 피하지 못했고, 좌우 양쪽으로부터 혹독하기 이를 데 없는 협공을 당했으며, 정권교체라는 비운을 피하지 못했다.
하여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 수립에 깊이 관여한 김 전 실장은 마치 양 정부 부동산 정책 실패의 아이콘처럼 인식됐고,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 책임의 가장 큰 몫이 김 전 실장에게 있는 것처럼 세인들로부터 사납기 이를데 없는 비판을 받고 있다. 거기에 더해 석연치 않은 부동산 통계 의혹까지 불거져 수사를 받을 수도 있는 처지다.
그런 김 전 실장이 쓴 책 ‘부동산과 정치’를 정독하고 든 느낌은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을 보는 듯 하다는 것이다. 유성룡이 후대에 다시는 ‘임진왜란’과 같은 참화가 발발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문제점과 잘못을 객관적으로 기술한 것처럼 김 전 실장도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집값을 잡지 못한 대내외적 원인들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며, 진보개혁진영이 취해야 할 부동산정책패키지에 담길 내용들을 시사한다.
김 전 실장은 ‘부동산과 정치’에서 문 정부가 집값을 잡지 못한 네 가지 책임을 짚고 있다.
일단 대출을 좀 더 강하게 죄었어야 했다고 밝혔다. 특히 전세자금이 집값 상승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문재인 정부가 이를 잡지 못한 건 아쉬운 대목이었다. 전세금을 토대로 한 ‘갭투자’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주택 구입 방식이다. 저금리와 유동성 확장 국면에서 집값의 20~30%만 대출받아도 집을 살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김 전 실장은 DSR 도입 시 “전세대출을 포함시킬 것인가 하는 점이 고민이었는데, 이는 우리 주택시장에 지각변동을 가져올 만큼 큰 문제여서 장기 과제로 미뤄뒀다”고 밝혔다. 설상가상으로 DSR 전면 도입도 당초 계획인 2019년 12월보다 훨씬 늦어진 2021년 이후로 미뤄졌다. 그사이, 주택담보대출 자체는 줄었으나 전세대출, 신용대출, 부동산기업에 대한 사업자 대출 등이 커지는 풍선효과는 막을 수 없었다고 저자는 분석했다.
또한 김 전 실장은 공급 불안 심리를 조기에 진정하지 못한 점도 문 정부 부동산 정책 실패 요인으로 꼽았다. 그는 “3기 신도시 결정과 1·2기 신도시 광역교통망 대책을 좀 더 빨리 입안하고 실행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했다.
이 밖에도 김 전 실장은 원칙과 규범을 고수하지 않아 부동산 규제의 신뢰를 잃어버린 점, 정책 리더십이 흔들렸던 점 등을 문 정부 부동산 정책이 집값을 잡는 데 실패한 원인으로 지목했다.
김 전 실장은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좌절한 대내적 원인만 지목하지 않는다. 그는 금융이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적 주택 가격 폭등의 근본원인임을 지적한다. 김 전 실장은 2000년 이후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 부동산 문제의 핵심은 주택의 금융화라고 지적하면서 집값 상승의 핵심 요인은 “돈이 자산시장으로 흘러들어가는 구조이며, 공급·세제·청약제도 등 한국적인 제도들은 부차적인 요인”임을 분명히 한다.
포스트 윤을 대비해야 하는 진보개혁진영의 필독서
‘부동산과 정치’에는 문재인 정부가 왜 집값을 잡지 못했는지에 대한 대내외적 원인 규명만 담겨 있지 않다. ‘부동산과 정치’에는 부동산 문제를 제대로 보기 위한 직언들로 가득하다. 예컨대 주기적인 상승과 하락의 사이클을 반복하는 부동산 시장의 구조, ‘부동산을 시장에 맡기라’는 주장의 허구성과 속내, 주택공급의 속성과 본질, 보유세 신화의 허상, 금융의 지배적 영향력, 양날의 검과도 같은 다주택자 문제, 반값 아파트라는 환상, 공공임대주택의 실상과 사회적 의미, 주택의 금융화와 투자상품화가 야기하는 폭풍 등을 정확히 알아야 부동산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있다고 김 전 실장은 주장한다. 울림이 크다.
김 전 실장은 온갖 비난이 쏟아질 것을 각오하고서 시장만능주의, 보유세 만능주의, 원가 공개만능주의를 직격한다. 또한 김 전 실장은 공급론을 물량 포퓰리즘으로, 토지임대부 등을 포함한 저렴 주택공급 제안을 반값 아파트 포퓰리즘으로, 집값 잡는 세금으로 알려진 보유세를 세금 포퓰리즘으로 비판한다. 이쯤되면 김 전 실장은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부동산 담론 거의 전부와 맞서는 형국이다.
끝으로 김 전 실장은 문재인 정부의 좌절에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교훈들을 열 가지로 정리한다. 예컨대 전 세계 부동산 문제의 핵심은 주택의 금융화라는 것, 시장의 일과 정부의 일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 부동산 시장에도 지켜야 할 규범이 있다는 것, 수요는 빠르고 공급은 더디다는 것, 경기에 따라 바꿔야 할 정책과 아닌 것이 있다는 것, 부동산 포퓰리즘 중독에서 벗어나자는 것, 이제 정부는 집값 잡겠다는 약속을 하지 말자는 것 등이다.
김 전 실장의 분석이나 제언에 반대할 수도 있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김 전 실장의 분석과 제언은 윤석열 이후를 준비해야 하는 진보개혁진영의 부동산정책패키지 설계에 유의미한 참고가 돼야 할 것이다.
진보개혁진영은 사람 귀한 줄 알아야
김 전 실장은 ‘부동산과 정치’에서 자신의 과오에 대해서도 솔직히 인정하고 있다. 부동산 정책 실패의 대명사처럼 회자되는 노무현 정부 당시의 인사가 다시 문재인 정부에서 부동산 정책을 책임진 것 자체가 리스크였을 수 있었다는 것, 집값이 더 올라갈 수 있었음에도 시장상황에 대한 인식이 다소 안이했었다는 것 등이 김 전 실장이 하는 자책의 주요 내용이다.
김 전 실장은 유동성의 홍수시대에 집값 안정을 위해 분투했고 성과도 있었다. 특히 2020년 코로나 19의 내습에 대응하기 위한 초저금리(호모사피엔스가 지구상에 출현한 이후 가장 낮은 금리였다)로 인한 주택 가격 폭등은 전 세계적 현상이었을 뿐 아니라 김 전 실장 퇴임 이후의 일로 그 책임을 김 전 실장에게 추궁하는 건 부당하며 불합리하다.
물론 노무현 정부 시기를 거치면서 금융의 가공할 위력을 온몸으로 경험한 김 전 실장이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부터 금융의 부동산 부문으로의 진입에 만전을 기울이지 못한 건 비판받아 마땅한 대목이다. 본인도 고백했지만 민간주택임대사업자에 대한 과도한 혜택도 제도 도입의 목적과 취지와는 별개로 타이밍을 완전히 실기했다.
분명한 것은 김 전 실장은 이미 맞아야 할 윤리적 매를 몇십곱절 맞았다는 사실이다. 가뜩이나 사면초가의 처지에 놓인 사람에게 윤리적, 논리적 돌팔매질을 해대는 것은 지양하는 것이 옳다. 진보개혁진영이 지닌 폐습 중 하나가 사람 귀한 줄 모른다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말해도 김수현 전 실장은 부동산에 관한 한 진보개혁진영 내에서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몇 안 되는 인재 중 한명이다. 인재는 키우긴 어렵고 망치긴 쉽다. 진보개혁 진영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