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야! 문제는 사업성이야, 안전진단이 아니고
이태경 / 토지+자유연구소 부소장
내년 6월부터 준공한지 30년이 넘는 아파트들을 대상으로 안전진단 없이 재건축에 착수할 수 있게 됐다. 윤석열 정부가 강력하게 드라이브를 건 재건축 규제 완화에 국회가 입법으로 뒷받침했다. 윤 정부는 부동산 시장에 끊임없이 땔감을 공급해, 시장참가자들을 현혹시킬 목적으로 안전진단을 생략한 채 재건축 착수가 가능하도록 했다. 하지만 돈 벌 욕심에 재건축 추진하다 평생 후회할 일을 만들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안전진단 없이 재건축 착수가 가능하다고?
25일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재건축 패스트트랙’ 도입을 위한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도시정비법) 개정안이 다음달 초 공포되고, 공포 후 6개월이 지난 날부터 시행된다. 이 개정안은 지난 14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개정법에는 안전진단의 명칭을 ‘재건축진단’으로 변경하고, 재건축진단의 실시 기한을 사업시행계획인가 전까지로 늦추는 내용이 담겼다.
지금은 아파트를 재건축하려면 먼저 안전진단에서 D등급 이하를 받아 위험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이 문턱을 넘지 못하면 재건축 사업을 준비할 조직 자체를 만들 수 없었다.
개정법은 안전진단을 통과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정비계획 수립 및 정비구역 지정→재건축 추진위 설립→조합설립 인가’ 절차를 진행할 수 있도록 했다.
지금은 재건축 추진위를 정비구역 지정 이후 꾸릴 수 있지만, 앞으로는 지정 이전에도 가능하다. 사업 초기 단계에서 법적 지위를 가진 주체를 통해 안정적으로 사업을 진행하지 못하면 사업이 지연되는 요인이 될 수 있어 시기를 앞당겼다.
또 지방자치단체(정비계획 입안권자)의 현지조사 없이도 주민이 원하는 경우에는 재건축진단을 추진하고, 연접 단지와 통합해 재건축진단을 할 수 있게 됐다.
아울러 재건축·재개발 과정에서 추진위, 조합 설립에 필요한 주민동의는 서면뿐 아니라 전자적 방식으로도 받을 수 있다.
안전진단 없이 재건축 착수가 가능하다보니 수도권 재건축 가능 단지 폭증
업계는 안전진단 없이 재건축 착수가 가능해짐에 따라 정비사업에 나서는 노후 단지들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서울시 집계 결과, 재건축 연한을 충족한 서울의 아파트 단지는 2025년 544개, 2030년 875개 단지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특히 이 가운데 안전진단 허들을 넘지 못한 노원·도봉·강남구(노도강), 강서구 등지 노후 단지가 수혜를 볼 전망이다. 서울에서는 30년 이상 노후 주택 비율이 47.1%(2022년 기준)로 가장 높은 노원구를 비롯해 △도봉구(38.1%) △양천구(33.4%) △용산구(31.0%) 등이 있다. 수도권 지역에선 경기도(1기 신도시 제외) △안산시 △수원시 △광명시 △평택시 등이 혜택을 받을 전망이다.
한편 이미 윤 정부가 안전진단 문턱을 대거 낮춘터라 실제로 재건축 안전진단 통과단지가 큰 폭으로 늘었다. 서울의 경우 지난 2018~2022년 평균 4.4곳에 불과했지만, 지난해 기준 71곳으로 16배가 증가했다. 전국 기준으로도 2018~2022년 평균 13곳에서 지난해 163곳으로 뛰었다.

출처 : 국토교통부
정비사업장은 지금 온통 송사 중
준공된 지 30년이 넘은 아파트들이 안전진단 없이 재건축에 착수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서 호재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해선 곤란하다. 이미 정비사업에 돌입한 수많은 조합들이 공사비 등을 이유로 소송 중이라는 사실이 방증이다.
국토교통부가 손명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최근 3년간 수도권 전체 정비구역 554곳 중 무려 103개 구역이 소송 중이다. 서울은 419곳 중 81곳(19.3%)이 소송을 벌이고 있다. 국토부 건설분쟁조정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접수한 총 32건의 분쟁을 조정하는 데 평균 548일이 걸렸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정비사업의 시작부터 끝까지 걸리는 시간이 너무 늘어나고 있다. 전국 정비사업의 추진 단계별 기간을 분석한 결과 2020년에는 정비구역지정부터 준공까지 평균 13.7년 소요됐으나 최근에는 이 기간이 15.59년으로 13.8%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되면 사업비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마련이다.
사업성이 관건이지 안전진단은 문제가 아니야
재건축이건 재개발이건 간에 사업을 추진하는 소유자들 입장에서는 분담금을 내지 않거나 최대한 적게 내고 새집을 갖는 것이 지고의 목표다. 그게 가능하려면 땅값이 비싸고(입지가 좋다는 의미다), 조합원들의 분담금을 전가시킬 수 있는 일반분양분이 많아야 하며, 가급적 분양가를 높여야 하고, 일반분양이 완판되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강남4구(강남구, 서초구, 송파구, 강동구)나 마용성(마포구, 용산구, 성동구) 등 입지가 좋고 부동산 시장이 활황이어야 정비사업이 성공할 확률이 높다는 말이다. 공사비가 폭등하거나 금리가 높거나 계획보다 사업이 지체되는 건 악재다. 사업성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안전진단 없이 재건축에 착수하게 해 주겠다는 윤석열 정부의 감언이설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 중의 하나는 안전진단 없이 재건축 사업에 착수할 수 있다는 의미이지 안전진단 통과가 필요없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강남이나 용산에서도 공사비 분쟁 등으로 인해 정비사업이 지체되는 마당인데 달랑 안전진단 없이도 재건축 사업 추진이 가능하다고 재건축 사업에 뛰어드는 만용을 부리면 정말 낭패를 당할 수 있다. 공사비는 내려올리 만무고, 금리도 떨어지기 어려우며, 부동산 시장에는 먹구름만 잔뜩 끼였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재건축을 강행하겠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본인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