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경 / 토지+자유연구소 부소장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세 번 연속 동결했다. 정부가 세 번째 부동산 대책을 내놓았는데도 서울 집값 상승세가 잡히지 않고 있는 상황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기준금리를 낮춘다면 투기심리를 강하게 자극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1430원대를 넘나드는 원/달러 환율이 더 치솟을 가능성도 고려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서울 등의 집값과 환율이 안정되지 않는다면 기준금리 동결이 상당히 길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고개를 들고 있다. 한편 이창용 한은 총재는 현재의 부동산 가격 상승이 한국 경제의 성장률을 갉아먹고 있다고 직격했다.

한은, 기준금리 3회 연속 동결해 2.50%로 유지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23일 통화정책방향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현행 2.5%로 유지했다. 이로써 금통위는 3회 연속 기준금리를 동결했다.
금통위는 지난해 10월 기준금리를 0.25%포인트(p) 낮추면서 통화정책의 키를 완화 쪽으로 틀었고, 11월엔 시장의 예상을 깨고 금융위기 이후 처음 연속 인하를 단행했다. 올해 상반기에도 네 차례 회의 중 2월과 5월 두 차례 인하로 완화 기조를 이어갔다. 건설·소비 등 내수 부진과 미국 관세 영향 등에 올해 경제성장률이 0%대에 그칠 것으로 예상되자 통화정책의 초점을 경기 부양에 맞춘 결과다.
하반기 들어 7월, 8월에 이어 이번까지 3차례 연속 금리를 묶은 것은 무엇보다 부동산 시장이 매우 불안하기 때문이다.
수도권 지역 주택담보대출을 최대 6억 원으로 일괄 축소하는 등의 6.27 대책에도, 10월 둘째 주(한국부동산원 통계·10월 13일 기준) 서울 아파트 가격은 2주 전(연휴 전)보다 0.54% 더 올라 상승 폭이 오히려 더 커졌다. 이에 정부는 서울 전역과 수도권 주요 지역을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하고, 15억 원이 넘는 집의 주택담보대출 한도를 2억∼4억 원으로 더 줄이는 10.15 대책을 서둘러 발표했다.
더 강한 부동산 규제가 나온 지 불과 1주일 만에 한은이 금리를 낮춰 주택담보대출을 부추길 경우 ‘정책 엇박자’ 논란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창용 총재도 지난 20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한은으로서는 유동성을 더 늘려 부동산 시장에 불을 지피는 역할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미국 관세 협상 불확실성 등에 최근 불안한 환율 흐름도 금리 동결의 주요 근거가 됐다.
지난 14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 주간(낮) 거래 종가(오후 3시 30분 기준)는 1431.0원으로, 4월 29일(1,437.3원) 이후 5개월 반 만에 처음 주간 종가 기준으로 1430원대에 다시 올라섰다. 이후로도 뚜렷하게 떨어지지 않고 1420∼1430원 대에서 오르내리고 있다.
여기에다 기준금리까지 낮아지면 원화 가치가 더 떨어져 1430원 대 이상의 환율 수준이 굳어질 위험이 있다.

아울러 반도체 등 수출 호조와 주식 등 자산 가격 상승에 따른 소비심리 회복, 내년 성장률 회복 전망 등으로 경기 부양 목적의 금리 인하 압박이 줄어든 점도 금통위원들의 동결 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날 금통위는 회의 의결문에서 “성장의 경우 전망 불확실성이 여전히 크지만, 소비·수출 중심으로 개선세를 이어가고 있다”면서 “부동산 대책의 수도권 주택시장·가계부채 영향, 환율 변동성 등 금융안정 상황을 더 살펴볼 필요가 있는 만큼 현재의 기준금리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금통위는 향후 통화정책 방향에 대해 “금융안정 측면에서 추가 부동산 대책의 효과를 점검하는 한편, 큰 환율 변동성의 영향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며 “성장의 하방 위험 완화를 위한 금리인하 기조를 이어 나가되, 이 과정에서 대내외 정책 여건 변화와 물가 흐름, 금융안정 상황 등을 점검하면서 추가 인하 시기와 속도를 결정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한은 총재 “금통위원 4명, 3개월내 금리인하 가능성 열어둬”
이 총재는 이날 금통위 회의 결과에 대한 기자간담회를 통해 “금통위원 6명 중 4명이 향후 3개월 내 기준금리 인하 가능성을 열어놨다”며 “나머지 2명은 향후 3개월 내 금리를 2.50%로 동결해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금통위 내 ‘3개월 포워드 가이던스’의 인하 대 동결 의견은 지난 7월 10일 4대 2에서 8월 28일 5대 1로, 이날 다시 4대 2로 변화했다.
이와 별도로 신성환 금통위원은 지난 8월 28일에 이어 이날도 기준금리를 연 2.25%로 0.25%포인트(p) 인하해야 한다는 소수의견을 홀로 제시했다. 이 총재는 “신 위원은 가급적 빠른 시점에 금리를 인하하고 경기와 금융안정에 미치는 영향을 지켜보면서 금리 결정을 이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라고 전했다.
이창용 총재 “현재 부동산 가격 상승, 한국 성장률 갉아먹어”
이 총재는 이날 통화정책방향회의를 마친 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집값에 대한 자극적인 발언을 해 눈길을 끌었다. 이 총재는 “부동산 가격 상승이 경제성장률이나 잠재성장률을 갉아먹고 있다”면서 “부동산 자산 가격이 올라 불평등도도 높이고 있다”이고 직격했다.
이어 “고통이 따르더라도 구조 개혁을 계속 해야 한다”며 “월세 받는 사람들에 세제 혜택을 주는 등 정책도 조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총재는 또 “서울과 수도권 부동산 가격이 소득 수준을 고려하거나 사회적 안정을 유지하기에 너무 높은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이 총재는 “주가는 국제 비교로 보면 아직 크게 높은 수준은 아니다”라며 “버블을 걱정할 수준은 전혀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시장에선 금리 인하 사이클이 끝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집값·환율 불안이 진정되지 않을 경우 한은이 다음 달에도 기준금리를 낮추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조영무 NH금융연구소장은 “대책으로 주택시장에 변화가 나타나면 좋겠지만, 11월에도 지금 같은 분위기가 이어지고 부동산, 환율 관련 우려가 계속 커지면 11월 금리 인하 가능성도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한미 기준금리 역전 현상이 2022년 7월 이후 이달까지 역대 최장인 3년 3개월째 이어지는 가운데 ‘뉴노멀’이 돼 버린 1400원대 고환율도 큰 부담으로 거론된다. 원/달러 환율은 최근 코스피가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 와중에도 5개월여 만에 가장 높은 수준으로 뛰어 1430원 선을 넘나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3500억 달러 현금 투자 요구가 원화 가치 하락 압력으로 작용하는 분위기다. 한미 양국 정상이 이달 말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대미 투자를 포함한 관세 협상을 타결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지만, 여전히 불확실성이 큰 상황이다. 설상가상으로 확장 재정을 예고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 선출로 엔화가 약세를 보인 점도 환율 상승 요인으로 꼽힌다.
반면, 경기 부양 필요성은 상대적으로 덜 부각되는 국면이다.
세계적인 인공지능(AI) 붐에 힘입어 반도체 호황이 이어지면서 하반기 들어 수출 둔화세가 완화되고, 경상수지 흑자 폭이 확대됐다. 한은은 올해 경상수지 전망치를 지난 5월 820억 달러 흑자에서 8월 1100억 달러 흑자로 대폭 높여 잡았다.
내수 경기도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분위기다. 한은은 국회 업무보고에서 “민간 소비는 소비심리가 빠르게 호전되면서 2분기 중 반등했고 하반기 들어 소비쿠폰 지급 등으로 개선세가 확대됐다”고 평가했다.
한은은 다음 달 수정 경제전망을 발표한다. 올해와 내년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0.9%와 1.6%에서 상향 조정할지 관심이 쏠린다. 올해 GDP 성장률을 분기별로 보면, 1분기에 전기 대비 -0.2%에서 2분기 0.7%로 반등했고, 3분기 1.1%까지 더 오를 것으로 한은은 지난 8월 전망했다.
심지어 시장 일각에서는 한은의 금리 인하 사이클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박정우 노무라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보고서에서 “한은이 내년 말까지 기준금리를 연 2.50%로 동결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김진욱 씨티 이코노미스트도 보고서에서 “한은의 금리 인하 사이클이 연 2.50%에서 멈췄다”며 “이후 내년 11월과 내후년 5월에 0.25%포인트(p)씩 금리를 인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집값과 환율이 한은의 기준금리 인하를 강력하게 억제하고 있는 반면, 수출과 내수가 살아나는만큼 인하 필요성도 급속히 사라지는 형국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