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통수 친 정부…정책상품 판 은행에 “주담대 폭증 원흉”
이태경 / 토지+자유연구소 부소장
지난달 5대 시중은행의 가계대출이 4조 원 가까이 폭증하면서 6개월 연속 증가세를 이어갔다. 빚내 집사기를 권장했던 윤석열 정부의 정책이 후폭풍을 맞고 있는 것이어서, 정부는 추가 대출 규제책 실행에 분주할 듯 싶다. 하지만 윤 정부는 신생아특례대출을 신설하기로 하는 등 가계대출을 규율하려는 의지가 있는지마저 의심받고 있다. 주목할 대목은 지난 4~9월 사이에 폭증한 주담대 가운데 절반 가량이 정부의 정책상품이라는 사실이다. 정부의 정책상품을 열심히 판매한 은행만 주담대 폭증의 원흉으로 몰려 여론의 뭇매를 맞는 현실은 불공정하다. 모름지기 정부가 할 일은 빚을 내 집을 사라고 시민들의 등을 떠미는게 아니라 집값이 자연스럽게 떨어진 후 시민들이 형편에 맞는 집을 사게 놔두는 것이다.
주담대가 3조 7천억 가까이 증가한 10월
6일 금융권에 따르면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가계대출 잔액이 10월 말 기준 686조 119억 원으로, 전월 대비 3조 6825억 원 늘어났다.
5대 은행의 가계대출 잔액은 지난 5월 1년 5개월만에 증가세로 돌아선 뒤, 6개월 연속 증가세를 이어갔다. 증가 폭도 5월 1431억 원에서 6월 6332억 원, 7월 9755억 원, 8월 1조 5912억 원, 9월 1조 5274억 원으로 늘어나다 급기야 10월 올해 최대로 커졌다.
가계대출 증가의 가장 큰 원인은 단연 주택담보대출이다. 지난달 5대 은행의 주담대 잔액은 521조 2264억 원으로, 한 달 새 3조 3676억 원 불어났다. 9월에도 3조 원 가까이(2조 8591억 원) 늘었던 주담대 잔액은 10월 더 늘면서 역시 올해 최대 증가 폭을 기록했다.
10월 들어서 주담대 잔액이 올해 최대 증가폭을 기록한 건 특기할만 하다. 주담대 위주로 폭증하는 가계대출에 놀란 윤석열 정부가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의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산정만기를 40년으로 축소하고, 일반형 특례보금자리론 공급을 중단하는 등 대출을 조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담대가 브레이크가 파열된 폭주기관차처럼 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담대 위주의 가계대출 증가세가 예사롭지 않음에 따라 정부도 대출을 더 조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예컨대 ‘변동금리 스트레스 DSR’ (변동금리 대출의 DSR 산정 시 향후 금리 상승 가능성을 감안해 일정 수준의 가산금리를 적용해 대출한도를 줄이는 제도) 연내 도입, 전세자금대출 등 현재 DSR 규제에서 제외된 항목들을 도로 추가하는 방안, ‘대출총량규제’의 재도입 등이 꼽힌다.
문제는 윤 정부가 물경 34조 원에 달하는 신생아특례대출(신생아특례구입대출 26.6조 원 및 신생아특례전세대출 7.6조 원)의 신설을 예산에 반영하는 등 가계대출의 증가를 막고 가계대출을 감축할 생각과 의지가 있는지가 근본적으로 의심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올해 급증한 은행 주담대 절반 가량은 정책 모기지 상품
6일 디딤돌·버팀목대출 현황에 따르면 올해 4월부터 9월까지 은행 주담대 증가분은 34조 4500억 원이며 이 가운데 디딤돌·버팀목대출의 신규 취급액은 15조 753억 원으로 비중이 무려 43.8%에 달했다. 이 상품은 주택도시기금이 재원이며 당해 사업비가 소진되면 시중은행이 이를 대신 집행한다. 정부가 이 상품을 다루면 가계대출 분류상 ‘정책 모기지’에 포함되지만 은행이 취급하면 ‘순수 은행 취급 주담대’로 분류 항목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디딤돌·버팀목대출은 이미 4월께 사업비가 소진돼 은행들이 이때부터 정부 대신 해당 상품을 취급하기 시작했고, 정책 모기지로 분류돼야 할 대출은 은행이 취급하는 주담대로 둔갑했다.
윤석열 정부와 금융당국은 주담대 위주로 가계대출이 폭증하자 수차 은행을 주범으로 지목한 바 있지만, 정부의 정책모기지 상품을 대신 판매한데 불과한 은행은 억울하기 짝이 없다. 물론 정부가 은행에게 가계대출 폭증의 책임을 은행에게 전가한다고 해서 정책모기지를 대신 판매한 은행에 지급해야 할 이차보전액까지 전가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토교통부가 올해 디딤돌·버팀목대출을 포함한 주요 사업 이차보전액(정책 모기지와 시중금리의 차액)으로 책정한 돈은 1조 95억 원으로 전년(4982억 원)보다 갑절 이상 폭증했다. 물론 이 재원은 세금이다.
집값이 떨어지는 게 최고의 내집마련 대책
윤석열 정부는 “더 많은 빚을, 더 쉽게 내게 해 줄테니 집을 사라”는 권유를 노골적으로 한 정부다. 이건 정부가 시민들을 상대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권장이다. 기실 최고의 내집 마련 대책은 집값을 구매가능한 수준까지 떨어뜨리는 것이다.
주택금융공사에 따르면 올해 2분기 전국의 주택구입부담지수는 68.0으로 올해 1분기(71.9) 대비 3.9포인트 내려갔다. 이는 2021년 1분기(63.6)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전국 주택구입부담지수는 2021년 4분기(83.5)부터 지난해 1분기(84.6)와 2분기(84.9), 3분기(89.3)까지 네 분기 연속 사상 최고를 경신한 바 있다.
그러다 고금리의 습격 등의 영향으로 지난해 4분기(81.4) 상승세가 꺾였고, 올해 1분기와 2분기에도 하락세를 지속하다 68.0까지 내려왔다. 주택구입부담지수는 중간소득가구가 표준대출을 받아 중간가격 주택을 구입하는 경우의 상환 부담을 나타내는 지수로, 주택구입부담이 지수가 낮을수록 완화되고, 높을수록 가중됨을 의미한다. 주택담보대출 상환으로 가구소득의 약 25%를 부담하면 주택구입부담지수는 100으로 산출된다.
주택구입부담지수는 가계 소득과 금리, 주택가격을 모두 포함하는 만큼 주택가격의 고평가 또는 저평가 여부를 판단하는데 유용한 지표이다.
지역별로 보면 서울의 주택구입부담지수는 2분기 165.2로 1분기(175.5) 대비 10.3p 하락했다. 서울의 경우 사상 최고를 기록했던 지난해 3분기(214.6) 이후 세 분기 연속 지수가 하락했지만 여전히 170에 육박해 주택구입에 대한 부담이 너무 크다. 2분기 주택구입부담지수 기준 서울의 중간소득 가구가 지역의 중간가격 주택을 구입할 경우 소득의 41% 정도를 주택담보대출 원리금 상환으로 부담해야 한다.
통상 서울의 경우 주택구입부담지수 130∼140(소득에서 주담대 상환 비중 33∼35%)선을 주택구매가 가능한 적정 수준으로 보고있다. 아직도 서울은 소득이나 이자 대비해서 집값이 너무 비싼 것이다.
서울의 주택구입부담지수가 함의하는 바는 간명하다. 최고의 내집 마련 대책은 집값을 구입가능한 수준까지 떨어뜨리는 것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