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값 올인 땐 대출 강요하더니 폭증하자 은행 탓
이태경 / 토지+자유연구소 부소장
집값 떠받치기를 위해 은행들에게 대출 규제 완화와 금리 인하를 강력하게 요구하던 금융당국이 가계대출이 급증하자 돌연 태도를 바꿔 은행들을 질타하며 은행 탓을 하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바뀌는 정부 정책에 은행들은 곤혹스러울 따름이다.
17개 은행장 불러놓고 가계대출 관리 실패 윽박지른 금감원
금융감독원은 이준수 은행·중소서민 부원장이 17일 은행연합회 및 17개 은행장과 간담회를 개최하고 내부통제 강화 방안과 가계부채 관리 방향 등 주요 현안 사항에 대해 논의했다고 밝혔다. 이 자리는 사실상 금감원이 은행들에게 최근 횡령 등 금융사고가 빈번하고, 가계부채의 증가속도가 너무 빠른 것을 질타하는 자리였다.
금감원은 최근 은행권 사고에서 내부통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자체 점검이 형식적으로 이뤄졌다는 지적이 있었던 만큼 은행장 주관으로 직접 내부통제 시스템이 실효성 있게 작동하는 지를 이달 말까지 종합 점검하라고 요구했다.
또한 금감원은 최근 가계대출 확대에 대해서는 증가 추이를 면밀히 모니터링하면서 가계대출 증가 폭이 과도하지 않도록 점검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금감원은 이달부터 10월까지 은행권을 대상으로 가계대출 취급실태에 대한 종합 점검을 실시하고, 가계대출 취급 관련 법규 준수 여부 및 심사 절차의 적정성, 가계대출 영업전략 등을 따져볼 예정이다.
특히 최근 가계대출 증가 요인으로 지목되는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에 대해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산정이 적정했는지를 살펴보고, 제도 개선이 필요한 사항이 있다면 관계부처 및 기관들과 협의를 거쳐 추진할 방침이다.
이날 이 부원장은 “가계대출 증가 원인을 상세히 분석하는 한편, (은행들의) 가계대출 취급 관련 법규 준수 여부와 심사 절차의 적정성 등을 진단하고 점검 결과 미흡한 점은 즉시 개선조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부원장은 이어 “거시경제와 금융시스템 안정을 위해 가계대출의 안정적 관리에 협조해 달라”고 당부했다.
전날 이복현 원장도 “8월 중으로 가계대출 관리 내지 실패와 관련해 은행 현장 점검을 내보내 실질적인 DSR 원칙이 작동하는지, 실질소득 성장을 넘어서는 대출이 일어나는지 등을 점검하겠다”고 밝혔다.
거기에 더해 김주현 금융위원장 역시 전날 50년 만기 주담대에 대해 연령제한 방안 등을 검토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쯤되면 금융당국의 수장들이 총출동해 은행들의 가계대출 관리실패를 매섭게 꾸짖으며, 은행들의 무분별한(?) 가계대출 관행을 금융당국이 엄격히 감독하겠다고 천명한 셈이다.

은행 가계대출 증감액 추이
집값 떠받치기에 올인하며 은행들의 팔을 비튼 윤 정부
하지만 은행들은 어리둥절하다. 불과 얼마 전까지 부동산 시장 연착륙이라는 미명 하에 집값 떠받치기에 올인하며, 은행들에게 대출 규제 완화와 금리 인하를 요구했던 정부가 표변해 은행들을 가계대출 폭증의 원흉으로 지목하고 나서니 왜 그렇지 않겠는가?
은행권 등의 주담대 폭증세가 윤 정부의 집값 떠받치기 때문이라는 건 천하가 다 아는 일이다. 윤 정부는 취임 초부터 집값 올리기를 위해 세제, 대출, 청약, 재건축, 분양가 등의 전 분야에 법률 개정이 필요한 것을 제외하곤 고장난 기관차처럼 시장 정상화 조치들을 해체시켰다.
특히 윤 정부는 빚내서 집 사라면서 대출 규제를 대거 완화했다. 생애 최초 주택구매 가구의 주택담보대출비율(LTV) 상한을 완화해 집값의 80%·최대 6억 원까지 대출을 허용하고, 심지어 규제지역 내 15억 원 초과 아파트의 주택담보대출도 가능하게 했다. 1·3 대책을 통해 서울 강남 3구(강남·서초·송파)와 용산구만 제외한 전 지역을 규제지역에서 해제하기도 했다.
심지어 윤 정부는 거기에 더해 올 초엔 소득을 따지지 않는 저금리 정책 상품인 특례보금자리론도 출시한 바 있다. 특례보금자리론은 연 소득에 상관없이 최대 9억 원의 주택을 담보로 5억 원까지 빌릴 수 있는 상품으로 최근까지 심사를 통과한 대출 규모만 무려 30조 원을 넘어선 상태다.
윤 정부는 뒤늦게 특례보금자리론의 공급규모를 축소하고 소득제한이 없는 상품의 금리를 올리겠다며, 특례보금자리론이 부동산 투기의 보급로이자 가계대출 증가의 주된 요인이며 고소득자의 집 마련 수단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했다.
결국 은행들은 윤 정부의 집값 떠받치기를 위한 정책수단으로 활용된 대출규제 완화를 추종한 죄(?) 밖에 없다.
심지어 올 3월 9일 이복현 금감원장은 “고금리로 국민의 이자 부담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은행도 고통을 분담하고 상생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필요하다.”고 기염을 토하며 은행들에게 ‘이자장사’ 그만하고 금리를 낮추라고 압박하기까지 했다. 은행들은 이 원장의 요구도 하릴없이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은행들은 어느 장단에 춤 춰야 하나?
불과 얼마 전까지 대출완화와 금리 인하를 압박하던 정부가 그 결과로 가계대출이 폭증하자 돌연 얼굴을 바꿔 은행들이 가계대출 증가의 원흉인 것처럼 몰아붙이는 모습은 눈살을 찌푸리기에 충분하다.
일례로 금융당국이 가계대출 폭증의 주된 원인 중 하나로 지목한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같은 경우 초장기 주담대 개념 자체가 지난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이미 나온 데다 작년부터 주택금융공사가 주도해 50년 만기 상품을 내놓고 있는 터다. 또한 금리 상승으로 인한 차주의 원리금 상환 부담을 낮춰야 한다는 당국의 의도가 반영된 상품이기도 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은행권에서 푸념이 나올 수 밖에 없다. 한 은행 관계자는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며 “가계대출이 조금씩 늘자 그동안의 완화 기조와 상반된 움직임을 보이면 은행 입장에서는 혼란만 가중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금융은 예측가능성과 투명성이 생명이다. 한데 윤 정부의 가계대출정책은 아침이 다르고, 점심이 다르고, 저녁이 또 다르다. 이래서야 은행 등을 포함한 금융기관이 어떻게 정부정책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윤 정부는 남 탓 하는 버릇 좀 고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