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를 배회하는 가격통제라는 이름의 유령
이태경 / 토지+자유연구소 부소장
윤석열 정부의 전방위적 가격하락 압박에 제분업계가 백기 투항한 데 이어 라면업계가 뒤를 이었고 제빵업체들도 가격인하 대열에 합류했다. 문제는 기업들의 팔을 비트는 방식의 가격통제가 물가안정에 주는 효과는 극히 미미한 데 반해 부작용은 심대하다는 사실이다.
제분업계, 라면업계, 제빵업계의 가격인하 릴레이
지난달 18일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한 방송에서 라면 가격 인하 발언을 했고, 지난달 26일 농림축산식품부가 제분업계를 소집한 직후 CJ제일제당이 식품의 원자재인 소맥분 가격을 5% 인하했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라면회사들도 라면 가격 인하를 발표하고 나섰다. 농심이 신라면 한 봉지의 가격을 1000원에서 950원으로 무려(?) 50원(6.9%) 내린 것이다.
라면업계에 뒤질세라 제과, 제빵 회사들도 가격 인하 대열에 앞다투어 나서고 있다. △해태제과 아이비 오리지널 △롯데웰푸드의 ‘빠다코코낫’, ‘롯샌’, ‘제크’ △SPC의 식빵, 크림빵, 바게트 등의 가격이 내렸다. 정부가 강하게 압박해 라면과 제과 업계가 가격을 내린 것이 처음은 아니다. 13년 전인 이명박 정부 때도 지금의 윤석열 정부와 흡사한 행보를 보인 바 있다.
가격통제는 공급부족, 상품 질 저하 등의 부작용을 낳아
윤석열 정부가 최근 제분업계와 라면업계 등을 상대로 보인 행위를 가격통제라고 평가하는 건 지극히 온당하다. 신자유주의의 교과서라 할 맨큐의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가격통제의 방식을 가격상한(price ceiling)과 가격하한(price floor)으로 분류한다.
가격상한제가 시장에 미치는 효과는 수요량이 공급량보다 많은 공급부족 사태의 발생이다. 공급부족 사태의 발생은 필연적으로 재화를 할당(rationing)하는 방식으로 연결되는데, 할당의 방식은 선착순일 수도 있고 연고(緣故)나 취향에 기반한 것일 수도 있다. 희소한 재화를 고객 중 일부에게 선별 배당하는 할당 방식은 선착순의 경우 시간의 낭비와 비효율을 초래하며, 연고나 취향에 기반한 경우 불공정할 뿐 아니라 재화에 대해 최고가를 지불할 의사가 있는 소비자를 배제한다는 점에서 비효율적이다. 반면 가격하한제는 공급량이 수요량보다 많으므로 공급과잉을 야기한다. 따라서 판매자들은 시장에서 소비가 되지 못하는 재화를 처분하기 위해 연고 등을 최대한 활용할 유인을 갖는다.
거의 모든 경제학자들이 가격상한제나 가격하한제 등의 가격통제에 반대하는 건 그래서다. 시장경제에서 가격이란 수요와 공급의 뒤에 포진한 수많은 소비자들과 기업들의 의사결정의 결정체다. 경쟁시장에서 가격은 수요와 공급을 일치시키고 경제활동을 효율적으로 조정한다. 한데 정부의 가격통제는 희소한 자원의 최적정 배분 기능을 수행하는 가격 메커니즘을 교란하게 마련이다.
윤석열 정부가 최근 제분업계와 라면업계 등을 대상으로 요구했던 가격인하는 가격상한제의 일종이라 할 것인데, 정부가 실효성 있는 가격상한제를 밀어붙이면 기업들은 당장은 서슬 퍼런 정부의 위세에 짓눌려 일부 품목의 가격을 인하하는 시늉을 하겠지만, 제품의 질을 낮추는 등의 방식으로 인하된 가격을 보전받으려 할 것이다. 또한 정부의 가격상한제가 장기간 지속된다면 기업들은 공급축소로 대응할 것이 자명하며, 이렇게 되면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소비자 후생이 크게 침해된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가격통제가 그렇게 좋은 것이고 부작용도 없다면 왜 주요 선진국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채택하지 않겠는가? 가격통제를 경제의 전 영역에 걸쳐서 강력하게 관철시켰던 국가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채택한 나라들이 그 나라들이다. 그리고 그 나라들은 거의 전부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버리고 경쟁시장경제를 채택 중이다.
윤 정부, 인하요인이 있는 다른 상품들에도 가격인하를 강하게 요구하길
백보를 양보해 윤 정부의 제분업계와 라면업계 등에 대한 가격통제 시도가 물가안정에 대한 선의로 해석되기 위해서는, 윤 정부가 가격하락 요인이 있는 모든 상품들을 파악해 그 상품들을 생산하는 기업들에 가격인하를 요구하는 후속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윤 정부는 내려봐야 티도 나지 않는 밀가루와 라면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생각을 하지 말고 가격을 인하하면 물가안정에 확실히 효과가 발휘되는 상품들을 상대로 대회전을 벌여야 옳다. 물가안정에 크게 기여하는 상품들은 대체로 손꼽히는 재벌들과 독과점의 이익을 누리는 공기업들이 생산한다. 입만 열면 공정을 외치는 윤 정부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공정을 입증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