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경의 토지와 자유]
인플레이션과 금융불안정 사이에 낀 연준
통화정책의 방향성을 잡는데 심각한 난관에 봉착한 연준
이태경 / 토지+자유연구소 부소장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을 수행 중인 미 연준(Fed)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복병을 만났다.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으로 촉발된 금융불안정이 급속도로 확산 되고 있는 것이다. 아직 디스인플레이션의 징후가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 마당에 은행들이 휘청거리는 사태가 겹친 것인데, 이는 연준을 진퇴양난의 어려움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아직은 미미하기만 한 디플레이션 신호
미 노동부가 2월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전년 동월보다 6.0% 올랐다고 3월 14일(현지시간) 발표한 바 있다. 이는 지난 1월(6.4%)보다 상승폭이 줄어든 것으로 지난 2021년 9월 이후 최소폭 상승이다. 전월 대비로는 0.4%상승했다. 전년 동월 대비 상승률은 시장의 예상과 부합했다.
반면 변동성이 큰 에너지·식품을 제외한 근원 CPI는 전년 동월보다 5.5%, 전월보다 0.5% 각각 오른 것으로 나타났는데, 전월 대비로는 1월(0.4%)보다 오히려 오름폭이 커졌다. 근원 물가를 끌어올린 ‘주범’은 주택 임대료를 비롯한 주거 비용이었다.

한편 미 연준이 기준금리를 결정할 때 중요하게 참조하는 PCE(개인소비지출) 물가 2월 지수가 3월 31일(현지시각) 발표됐는데 전년 동월 대비 5% 올랐으며, 이는 블룸버그가 43개 기관으로부터 취합한 예상치(5.1%)보다 0.1%포인트 낮은 수치였다. 1월 PCE지수는 5.3%였다. 변동성이 큰 식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근원 PCE 물가 상승률은 1월보다 0.1%포인트 낮은 4.6%를 찍었다.
CPI와 PCE가 하락하는 추세를 보이고는 있지만, 여전히 연준의 물가 타겟인 2%(PCE 물가 기준)와는 이격이 크며, 임금이 핵심인 서비스물가가 여전히 견조하다는 점이 연준의 근심거리다. 3월 30일 발표된 지난주(19~25일) 신규 실업수당 청구 건수는 19만8000건으로 20만건을 하회해 여전히 미국의 고용시장이 탄탄함을 증명했다.
요컨대 미국의 경우 물가지표가 여전히 높고 고용지표 역시 견고해 연준이 희망하는 디스인플레이션의 신호가 뚜렷하게 포착되지 않고 있다. 연준이 기준금리를 섣불리 인하하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재진행형인 금융시스템 불안정
미국 중소기업은행들의 뱅크런과 유동성 위기를 촉발시켰을 뿐 아니라 스위스 2위 은행인 크레디트스위스(CS)의 UBS에로의 인수 등으로 이어진 금융시스템 불안정이 연준의 돌진적 기준금리 인상 드라이브로 야기됐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예컨대 금융시스템 불안정의 진앙이 된 실리콘밸리은행(SVB)의 경우 실리콘벨리의 벤처와 스타트업을 주 고객으로 하여 급성장을 한 로컬은행으로서 유동성의 홍수 시기를 맞아 예금은 넘치고 대출은 격감하자 보유 예금 중 일부를 미 국채 등에 투자했다. 한데 인플레이션의 습격에 대응한 연준의 돌진적 기준금리 인상의 결과로 돈줄이 마른 예금주들이 예금을 인출하기 시작했고 이를 충당하기 위해 실리콘밸리은행(SVB)가 금리 인상의 직격탄을 맞아 가격이 폭락한(채권수익률의 상승)미 국채를 팔자 공황상태에 빠진 예금주들이 뱅크런을 했고 그 결과 실리콘밸리은행(SVB)은 파산했다.
즉 실리콘밸리은행(SVB)의 파산은 부실대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상상도 못한 연준의 기준금리 인상 드라이브에 따른 국채 가격 폭락에서 기인한 것인데, 이는 과거 은행들의 파산과는 성격과 양상이 완전히 다르다.
중소은행들의 뱅크런과 유동성 위기에 시달리는 연준은 BTFP(은행 기간대출프로그램)을 통해 국채를 액면가로 하여 담보로 삼고 국채를 보유한 중소은행들에 유동성을 공급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예금자 보호 한도 상향카드를 만지작거리며 은행시스템 불안정을 진정시키려 노력 중이다. 또한 미 연준, 유럽중앙은행(ECB), 캐나다·영국·일본·스위스 중앙은행은 3월 19일 UBS의 크레디트스위스(CS) 인수 발표 후 달러화 스와프협정 상의 유동성 증대를 위해 공동 행동에 나서기로 결정하는 등 서방 중앙은행들이 유동성 공급을 통한 금융시스템 안정에 올인하는 모양새다.
하지만 신용불안이라는 것은 전염병과도 같아서 한 번 번지면 쉽사리 진정되기 어렵다. 중소은행에서 초거대은행으로의 예금의 대이동 같은 현상을 보면 예금자들의 마음 속에 자리 잡은 불안감이 여전함을 알 수 있다.

긴축과 완화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진 연준
지금 연준의 처지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진퇴양난(進退兩難)쯤 될 것이다. 인플레이션의 불씨를 확실히 진압하기 위해서는 기준금리 인하를 물가와 고용지표가 디스인플레이션 국면에 진입했다고 확신할 때까지 늦추고 싶을 테지만, 금융시스템을 하루빨리 안정시키고자 한다면 완화적 통화정책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다.
현재 연준 입장에서 최선은 금융시스템에 대한 예금자들의 신뢰가 신속히 회복되는 가운데 디스인플레이션의 신호들이 속속 등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연준은 큰 고민 없이 이른바 연준피벗을 단행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연준 입장에서 최악은 물가가 끈적끈적하게 떨어지지 않는 동시에 금융시스템의 불안이 확산되는 사태다. 이렇게 되면 연준은 인플레이션 진압과 금융시스템 안정성 복원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하는 처지에 몰리게 된다. 지금 연준은 혹독한 시간을 건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