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서 가장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산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저는 마더 테레사를 꼽고 싶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그녀 자신의 삶을 통해서 불행한 세상에 빛과 생명을 펼치기를 바랐습니다. 가장 약한 자들에게 다가가서 그들과 함께 사는 것을 보며 어둠에 속한 자들 마저 그리스도에게 끌림을 느끼기를 바랐습니다.
이러한 마더 테레사의 삶은 저에게 언제나 도전이었고 희망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남기업 소장님께서 ‘테레사 수녀의 헌신은 고귀하나, 테레사 수녀의 사역으로는 인도의 빈곤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불가능하다.’라고 하신 말씀은 한편으로는 참 불편한 진실이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녀로 지정되고, 시성의 절차를 밟고 있는 그녀의 아킬레스건은 이것입니다. 그녀는 불의한 구조를 상존의 원리로 받아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녀의 “가난은 아름답다”는 말은 뒤집어, “가난은 언제나 거기 있을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캘커타의 빈곤의 가장 중심된 원인인 계급제도와 빈부격차에 그녀는 무관심했다는 비판은 사회의 내적 정의를 탐구하는 우리에게 동일한 질문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개개의 불의한 사건들이나 개개인의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관심을 갖지만 ‘사회구조’에 대한 거대담론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남기업 소장님의 강의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사회 전체를 보는 눈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사명으로 사회적 불의를 극복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대한민국 사회-이름하여 자유민주주의체제라 자칭하는-는 개개인의 잘잘못에 크게 관심하지만 사회적 정의에는 다소 무감각한 곳입니다. 정치에 대한 환멸이 이른바 거대담론 무용론 같은 무관심을 강화하는 상황이 반복되었으며, 사회 전체의 복리를 증진시키는 것 보다는, 승자독식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성공과 실패를 개개인의 책임에 귀속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곳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개인적인 선행 혹은 빈자에 대한 ‘;부유한 자’;들의 부조는, 기부와 선행이 그 자체로 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악을 은폐하고 기득권중심의 구조를 강화하는 기제로 작용해 왔음을 이번 강의를 통해 다시 느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은 땅값이 문제다’라고 보수와 진보 양 진영이 한목소리를 내는 작금입니다. 이것이 문제인 줄 전국민이 다 아는 세상이 되었는데도 변한 것 하나 없어 더 놀라운 세상입니다. 잘못인 줄 알면서도 자기 땅값이 올라 소득을 얻을까 기대하는 마음에 너도나도 아파트를 사고 투자정보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는 그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소위 땅부자, 투기꾼들을 비난하는 것은 직접적이고 쉬운 일이지만, 역사는 그런 류의 비난이 사회발전에 1g의 기여도 해낼 수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살인자들을 비난하고 그들을 처벌하는 것이 살인사건 발생율 감소에 대단한 기여를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토지문제라는 것이 불의를 강화하는 일이라면, 우리는 이 사회적 불의를 경감시킬 수 있는 대안을 탐색해야만 합니다.
이에 대한 해답은 지공주의이며 구체적인 실천수단은 지대조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는 ‘부동산과 조세’에 대한 다음 강의가 가장 기대가 됩니다.) 제게 “떠오르는 조지스트”라는 별명을 붙여준 한 친구를 기억합니다. 그는 자기는 지공주의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라며, 지금은 그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이론적으로 가장 아름답지만, 절대 이 사회에서 실현시킬 수 없는 사상”이라며, “초끈이론이 수학적으로 완결적이라고 해서 실존하는것은 아닌것과 마찬가지”라며.. 자기 생각에는 별로 실현가능성은 없는 것 같지만 네가 그렇게 좋아하니 응원하겠노라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으며 제 안에 다짐이 생겼습니다. 지공주의가 토지정의라는 당위에 의해서만 주장되는 것이 아닌, 보다 현실적이며 실현가능한 것으로 그 친구에게 납득될 때까지 쉬지 않으리라는 다짐, 그 다짐으로 우리의 남은 강의들과 우리의 구체적인 실천을 기다립니다. 여기 토지정의 아카데미에 모인 모든 ‘;떠오르는 조지스트’;들과 함께, 이미 왔으나 아직도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찾아가기 바랍니다.